516 군사정변 박정희 군사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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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정변은 1961년 5월 15일 저녁부터 1961년 5월 18일까지 서울, 부산, 대전, 광주, 김포, 부평, 수색, 포천 등에서 임시적 군정 실시를 목적으로 일어난 쿠데타를 말한다. 이칭으로 5.16 군사 쿠데타, 5.16 군사혁명으로 불린다. 주동자는 서울을 관할하는 제6관구의 전 사령관이었던 박정희이며, 자신 주변 뜻이 같은 장성 및 수십 명의 핵심 영관급 장교들과의 사전 모의를 통하여 군정을 수립하고자 하였고, 사전에 참여 병력으로는 김포 공수단 1000여 명, 해병 제1여단 1300여 명, 6 관구 사령부 소속 병력 1700여 명, 제6군단 포병단 5개 대대 3000여 명과 제5사단, 제12사단, 제30사단, 제33사단 그리고 2군을 비롯한 지방에 있던 여러 장교들까지 수만 명에 달하는 군사쿠데타였다.


목차

 


5.16의 역사적 배경

역사적 배경으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는데 국내적 배경과 국외적 배경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국. 내외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국내적 배경

국내적 배경은 또한 군 내부 배경과 정치. 사회적 배경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먼저 군 내부 배경을 보면 한국전쟁을 통한 군부의 급속한 비대화가 있다. 한국전쟁 이전 10만여 명 내외에서 60만 명 이상으로 확대된 군부는 미국의 집중 원조를 받았는가 하면 주요 군 간부들은 미국 유학을 통해 근대적 기술과 사고방식을 접하게 되어 여타 사회 분야에 비해 엘리트 의식이 매우 강화되었다. 또한 이승만 정권에 의한 군의 정치화 과정은 군부 엘리트 장교들 사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박정희와 같은 정치 지향적 군인을 양산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을 통해 초창기 군 간부들은 고속 승진할 수 있었으나, 육사 8기생 등 후배 그룹들은 인사적체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1950년대 군부에 만연한 부정부패는 청년 장교들의 불만을 더욱 강화시키게 되어 이른바 정군 운동이 발생하는 등 쿠데타의 한 배경을 이루었다.

 

국내 정치 사회적 배경으로는

 

첫째

4.19 혁명 이후의 정치. 사회적 정세의 유동성이다. 4.19 혁명으로 수립된 허정 과도정부나 이를 계승한 장면 정권은 4.19 혁명의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면(당시 국무총리) 정권의 부정축재자, 선거부정 관련자 처리도 지지부진했고,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 억압되었던 다양한 사회적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지만 이를 제대로 수렴하지 못했다. 오히려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이라는 2대 악법 제정 시도와 같이 대중적 진출을 억압하기 위해 노력했기에 커다란 반발만 불러왔다.

 

두 번째

장면 민주당 정권의 내분이었다. 신파와 구파로 분열된 민주당은 극심한 내부 분열로 제대로 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장면 주도의 신파와 윤보선. 김도연 등의 구파는 총리와 대통령 자리를 놓고 격돌한 이래 사사건건 대립했다. 결국 장면 총리, 윤보선 대통령이 결정되기는 했지만 분열은 더욱 극단화되어 구파는 1960년 9월 22일 민주당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신민당을 창당하여 극한투쟁을 벌였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장면 정권은 두 달이 멀다 하고 개각에 개각을 거듭해야 하는 정치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세 번째

혁신계, 학생. 청년, 노동 분야 등을 중심으로 진행된 사회운동의 양질적 발전이었다. 혁신계는 주로 명망가 중심의 정당운동을 전개했지만, 학생과 청년 부분은 실질적인 대중동 원력을 갖춘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특히 혁신계와 청년. 학생운동은 통일운동을 중심적으로 벌이기 시작했는데, 보수 진영의 반공 이데올로기 공세라는 역풍을 불러오기도 했다. 교원노조 운동 등으로 나타난 노동운동 또한 기존의 억압적 노동통제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기존 지배질서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사회운동 세력의 힘이 기존 질서에 실질적 위협으로까지 성장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단적으로 7.29 총선에서 혁신계는 고작 5석에 그쳤을 뿐이며, 통일운동이 대중의 광범한 지지를 얻었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노동운동 또한 본격적 산업화 이전이라는 시대적 한계를 넘어설 수 없었다. 그리고 사회운동은 쿠데타 세력에 의한 반공 이데올로기 공세의 희생양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국외적 배경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가 중요했다. 미국은 1950년대 말부터 직접 원조를 삭감하면서 피원조 국가의 자체 생산력 강화를 도모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로스토우 등의 근대화 노선으로 연결되었다. 미국의 근대화론에서는 경제성장 문제가 매우 중요한 과제였으며, 이를 추진할 근대적이고 강력한 리더십 문제를 강조했는데 군부가 새로운 리더십의 주요 구성 부분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미국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쿠데타 발발과 진압에 결정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아울러 1950년대 세계적으로 군사 쿠데타가 빈발하고 있었다는 점도 하나의 배경을 이루었다.

 

5,16 군사정변의 원인

 

 

5.16의 발단은 정군 운동이었다. 정군 운동이란 1960년대 국군 내 하급 장교들이 상급 장교들의 용퇴를 요구한 운동을 말한다. 정군 운동의 결과 1960년 5월 20일 송요찬 참모총장, 5월 31일에는 당시 한국군에서 최고 계급을 갖고 있던 백선엽 대장 등이 자진 사퇴를 발표하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미국의 반대와 허정 과도정부의 미온적 대응으로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특히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이었던 매그루더는 송요찬의 사임 직후인 1960년 5월 25일부터 29일까지 거의 매일 공개적으로 4·19 혁명으로 인한 정치적 변동이 군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며 정군 운동을 견제하는 발언을 했다.

 

곧이어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김종필, 오치성, 김형욱 등 5.16 주체세력의 핵심 멤버 육사 8기생 9명이 분열된 상태로 무능한 국정운영을 펼치고 있는 민주당 세력을 제거해 군정을 수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1960년 9월 10일 이른바 충무장 결의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그해 말에 이르면 박정희를 정변의 지도자로 세우자는 데에 합의하였고,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인맥, 군내 인맥 등을 이용해 장경순, 한웅진, 채명신, 이주일 등 자신과 알고 지내던 육군 장성과 6 관구 참모장 김재춘 등을 거사에 끌어들였고 김형욱 등이 육본에서 동지들을 작전참모로 추천하면 부관감실에서 근무하던 오치성이 인사발령을 내는 방식과 포섭한 동지의 인맥을 이용해 2차. 3차 포섭하는 방식으로 제30사단, 제33사단장, 문재준과 6군단 포병단, 공수 전단 등을 포섭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제1201 야전 공병대 포섭은 실패해였다. 따라서 조직은 포섭될만한 이들을 중심으로 비밀스럽게 조직되었다.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였던 장면은 이러한 정보를 조금씩 보고받거나 입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김형욱 등은 전라도 국회의원들이 육군 장성들과 결합해 서울 인근 부대들을 포섭하려 한다는 소문, 족청계 장성들을 중심으로 일선 부대가 거사할 것이라는 소문 등 역정보를 3중, 4중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심지어는 2군 부사령관 박정희와 육본과 후방 부대들을 동원해 거사하는데 육군 참모총장이 그들과 결탁했다는 소문까지 공공연히 유포되어 장도영과 장면에게 각각 보고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5.16 정변 세력은 전화, 모임에서 사장, 전무, 공사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사업으로 위장함으로써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그 결과 막연한 정변설만으로 장성들을 체포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러려면 장도영이 장도영 스스로를 체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장면과 장도영은 각각 검찰과 군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근거를 잡는 데에 주력했다. 그러나 근거는 전무하였다. 오히려 군경 합동수사 결과 체포된 김덕승은 허위진술을 해버렸다. 장도영 역시 백운상 대령을 대구로 내려보내 근거를 수집케 하였으나 쿠데타를 입증할만한 아무런 근거도 얻을 수 없었다.

 

당시 미국 정보국과 장총리의 고문이었던 위태커는 정보를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이 정보를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변 세력을 이용하기 위해 이러한 행동을 했을 거라 보았지만 실상은 장도영도 육군 방첩대장 이철희 준장에게 속아 넘어가고 있었다. 이후 박정희는 해병대를 끌어들이는 한편 윤치영, 임영신, 임병직 등의 인사들과도 사전에 여러 번 교섭하였고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5.16은 발각되지 않고 마침내 성공에 이르게 된다. 군 내부의 숨은 간첩 세력과 이것으로 인해 야기된 무정부주의적 사회 분위기가 정변의 원인으로 본다. 박정희를 주축으로 한 군사혁명위원회는 제2공화국의 정치력 부재와 사회. 경제적 혼란으로 응축되어 있던 불만이 촉발된 성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군사혁명위원회(국가재건 최고회의)

 

국가재건 최고회의는 대한민국에서 5.16 군사 정변 이후 정변 주도세력이 5월 18일에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이름을 바꾸어 발족시킨 입법. 행정. 사법의 3권을 행사했던 통치기구이다. 첫 번째 군사 내각은 5월 20일에 발표됐으며,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5.16 군사 정변 당일,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면서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장도영을 의장으로 하고, 자신은 부의장으로 취임했다. 정변 3일째인 5월 18일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 최고회의로 개칭했다. 6월 10일에는 방첩기관이자 감시기관인 국가정보원의 연원이 되는 중앙정보부가 발족했다. 박정희는 이후 군 일부 반혁명 사건(일명 알래스카 토벌 작전)을 일으켜 군부 내의 반대세력을 숙청한 뒤 7월 3일에는 장도영을 이에 연루시켜 의장직에서 추방했고, 추대 형식을 빌어 스스로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이 되었다.

 

정치. 입법에 대한 국가재건 최고회의의 8.12 선언문

 

1. 혁명정부는 정권 이양에 앞서서 진정한 민주정치질서를 창건하고 구악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1. 구악일소와 법질서 확립
  2. 모든 체제의 개역 및 발전
  3. 종합 경제 5개년 계호기의 추진 등의 기초결업을 완수한 후에 정권을 민간정부에게 이양한다.

 

2. 정권 이양 시기는 1963년 여름으로 예정

  1. 1963년 3월 이전에 신헌법을 제정하고
  2. 1963년 5월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정당활동 허용시기는 1963년 초로 한다.

 

3. 정부형태는 대통령 책임제를 선택하고

  1. 국회 구성은 100인 내지 120인의 단원제로 하고
  2. 선거관리는 국가 공영제로 하고
  3. 구 정치인 중 부정 축재한 자의 정계 진출을 방지하기 위해 입법조치를 취한다.

 

5.16 군사정변의 시작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제2군 사령부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육사 3-5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부사관과 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의 주요 기관을 점령하였다. 또한 공수단은 장면 총리의 숙소이던 반도호텔을 급습하였으나, 총리의 도피로 체포하지 못하였다. 장면 총리는 애초 쿠데타 소식을 듣고 미 대사관으로 피신하고자 했으나 신원불상 자라는 이유로 출입이 저지되었으며 재차 미 대사관 숙소로 피신하고자 한 시도도 같은 이유로 실패했다. 이에 천주교 신자였던 장면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잘 알고 있었던 혜화동의 깔멜 수녀원으로 몸을 피하게 되었다.
당시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는 실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주요 군 지휘자 중의 하나였던 1군 사령관 이한림은 쿠데타 진압에 적극적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모호한 입장과 국군끼리 피를 흘릴 수 없다는 윤보선 대통령의 입장으로 진압작전은 시행될 수 없었다. 사실상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지자 쿠데타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문재준 대령 제6군단 포병단 지휘관과 박치옥 대령 등은 곧이어 박정희가 부의장으로 취임하고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이 의장으로 추대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해 전권을 장악하고, 정변의 성공과 6개 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

 

혁명공약 6개 항

 

1.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 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 (군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민간)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을 조속히 성취하고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굳건한 토대를 이룩하기 위하여 우리는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5.16 군사정변 성공

 

제2공화국 당시는 의원내각제이었던 상황에서 헌법상의 국정. 국군 통솔권은 국무총리인 장면에게 있었다. 그는 장도영의 전화를 받고 새벽 4시경 미국 대사관으로 향해 군사 세력을 진압하려 했지만 직원이 부재중이라 들어갈 수 없었고 카르멜 수도원으로 피신하여 수차례 미국에 사태 진압을 요청했다. 5월 17일, 매그루더는 박정희 소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박정희 소장은 절대적으로 군을 물릴 수 없다는 의지를 보였다. 5월 18일, 박정희는 유원식을 데리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그러나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군을 진압하기보다, 올 것이 왔다라며 체념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5월 20일에는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 최고회의로 개편되고 장도영을 헌법에는 없는 "내각수반"으로 임명하였다. 정변 초기에 미 8군 사령관 C. B. 매그루더, 야전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기도 하였으나 美 정부의 신속한 지지 의사 표명, 장면 내각의 책임 자각형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의 체념 등에 의하여 성공했다.

 

윤보선 대통령 성명 발표 하야 번복

1961년 5월 19일 대통령 윤보선은 오후 8시 30분 방송을 통해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다음날인 5월 20일에 성명 발표를 번복하였다. 성명 발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번 군사쿠데타가 발생하면서 나는 무엇보다도 귀중한 인명의 희생이 없기를 바랐으며 순조롭게 수습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다행히 하늘은 우리를 도와서 무사하게 이 나라의 일을 군사혁명위원회의 사람들이 맡아서 보게 하였으며 국민 여러분이 또한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지금 안심하고 이 자리를 물러나겠습니다. 아무쪼록 군사혁명위원회의 사람들은 그 소신과 충성을 다하여 이 나라를 발전시키고 이 국민을 하루속히 궁핍에서 건져내 주기를 바라며 나의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이에 협조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바입니다.


윤보선의 사퇴 발표가 있자 군정 측은 그의 사퇴를 만류하였다. 5월 19일 밤 박정희와 장도영이 청와대를 찾아와 윤보선의 사퇴를 만류했다. 그러나 그 만류는 시늉이었다. 장도영에겐 윤보선이 좀 더 필요했던 것 같으나, 박정희는 윤보선의 사퇴를 속 시원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사퇴를 고사한 일로 후일 민주당 신파 계열에서는 그가 군사정권에 협력했거나 내통, 또는 매수했다며 공격하였다. 5월 20일 상오 외무부 차관 김용식이 윤보선에게 "유일한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이 시점에서의 하야는 국제법상 새 정부의 승인 문제를 복잡하게 할 우려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김용식은 이 점을 박정희에게도 설명했다. 5월 20일 오후 2시 윤보선, 박정희, 장도영, 김용식 4자 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용식은 다시 "만일 각하가 사임한 뒤 이북이 남침하면 외국과 유엔에 호소하려 해도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호소할 기관이 없다."며 사임 재고를 요청했다. 재고 요청에 박정희와 장도영, 미국의 만류도 있었다.

 

결국 윤보선은 당일 오후 6시 예정돼 있던 고별 회견 대신 "국가재건 최고회의에서 하야하겠다는 나의 결정이 국제적, 국내적으로 영향이 크다 하므로 나라 일을 해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만부득이 이 나라 형편을 생각하여 번의 해야 할 것 같다."며 하야를 번복, 번의 회견을 하였다. 1961년 6월 6일 국가재건 최고회의와 현충일 행사에 참석하였다.

 

사진

 

5.16 군사정변 결과


당시 청와대 접견실에서 박정희, 장도영 등을 만난 대통령 윤보선은 "올 것이 왔구나."라는 말로 입을 열었다. 혼자 하는 말이었지만 소리가 워낙 커 다른 사람들도 그 말을 들었다고 한다. 요약을 하면, 장면 총리는 진작에 물러났어야 했으며 민주당은 무능했다는 얘기였다. 국방부 장관 현석호를 비롯한 각 부서의 장관, 차관, 처장급 인사들이 줄줄이 가택에서 체포되거나 연행되는 형식으로 청와대에 끌려왔다. 이때 민주당 신파의 각료인 정일형, 현석호 등은 윤보선의 발언을 듣고 경악한다. 현석호는 회고록에서 윤보선은 이 말에 이어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었다."면서 장면 정부에 비난을 퍼붓고 박정희의 거사에 찬사를 보냈다고 했다. 

 

5월 16일 혁명위원회 포고 제4호로써 민의원, 참의원 및 지방의원 등 대의원 헌법기관은 해산되었고 5월 22일 국가재건 최고회의 포고 제6호 정당 및 사회단체는 해산되어 정치활동이 완전히 금지되었다. 따라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장면 내각은 붕괴되었고 국가재건 최고회의에 의한 약 3년간의 군정통치가 이루어졌다. 군정기간 중 정변 세력은 특수범죄 처벌법, 정치활동 정화법 등의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하였다. 또한 핵심 권력기구로서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민주공화당을 창당해 대통령제 복귀 등을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을 하였다.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의장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현직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을 물리치고 제5대 대통령에 취임(제3공화국)하였다. 이후, 박정희는 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윤보선을 물리치고 승리하며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5.16 군사 정변 이후

 

5·16 군사 혁명 이후 사회정화와 구악일소의 일환으로 육군 공수특전단 대원들에 의해 조직폭력의 소탕이 시작되었고, 이정재, 유지광, 임화수 등의 정치깡패들과 그들의 조력자였던 광영주 등의 친 자유당 경찰 세력은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서울 시내에서 조리돌림을 당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유지광은 갑종장교 출신에 대학 나온 인재라고 처형만은 면하였다. 정변 당시 수많은 인사들의 지지 성명이 있었는데 장준하는 사상계 6월호에서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라며 군사정변을 지지하였고 언론인 송건호도 제3공화국 민족적이라고 평가하여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박정희는 정변 직후 독립운동가 김학규를 사면. 복권시켰다. 이후 그가 중풍으로 쓰러져 운신에 지장이 생기자, 박정희는 한학자인 최서면에게 김학규를 입원시켜 드리고 돌봐 드리도록 부탁하여 국군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병석에서 입버릇처럼 항상 박정희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을 하였다. 또한 1962년 3월 1일과 8월 15일 독립운동가 2천여 명에 대한 포상을 단행했다. 이 조치들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함이었다는 후문이 있다.

 

5.16 군사정변의 평가와 비판

 

5.16 군사쿠데타는 향후 30년 이상 지속된 군사정권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라는 점에 그 중요성이 있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권 30여 년은 민주주의의 암흑기였다. 쿠데타는 헌정질서를 유린하는 행위이기에 절차적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었다. 정부 수립 후 불과 13년 만에 이루어진 군사 쿠데타는 헌법 질서가 제대로 자리를 잡기도 전에 그것을 붕괴시킨 사건이었으며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시련이었다. 다음으로 군사 쿠데타는 전 사회의 군사화 내지 병영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군사 엘리트들이 국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모든 가치의 중심에 군사적인 것이 놓이게 되었다. 전 사회를 군대식 관리와 통제 하에 두고자 하였으며 국가 정책 또한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이 내건 근대화는 바로 이러한 군사적 견지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이는 한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사회를 오직 효율성과 목적 달성이라는 군사주의적 시각이 지배적인 입장이 되도록 만들었다.

 

한편 5.16 군사쿠데타는 본격적인 경제개발 추진과 밀접히 관련되었다. 경제개발계획은 이미 장면 정권에 의해 준비된 것이기도 했지만 실제 추진은 군사정부에 의해 이루어졌다. 군사정부와 그 뒤를 이은 제3공화국은 경제개발에 모든 사회적, 인적 자원을 집중 투입하였다. 노동자, 농민 등의 삶을 희생시켜서라도 급속한 경제발전을 도모하고자 했던 군사정권은 비민주적이고 반동적인 근대화 정책을 집행한 것이었다.

 

  • 언론인 함석헌은 "여러분은 아무 혁명이론이 없었습니다. 단지 손에 든 칼만을 믿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민중은 무력만으로 얻지 못합니다."라고 하며 쿠데타를 비판했지만, 큰 호응은 없었다.
  • 정변 직후, 언론인 장준하를 비롯한 당대의 지식인들이 이를 '민족주의적 군사 혁명'으로 평가, 지지했다. 박정희는 군사정변 직후 민정이양과 혁명과업 수행을 약속하였으므로, 이러한 기대감 속에 당대 지식인들은 국가재건 최고회의 등 요직에 진출하기도 했다.
  • 5.16 군사정변으로 세워진 국가재건 최고회의 이후 박정희가 국민 직접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수차례의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수출 중심주의의 고속성장 정책으로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최단시간 경제성장을 달성한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냈기 때문에 성공한 이면이 있는 군사정변이라는 평가가 있다.

 

5.16 군사정변과 북한

 

북한은 5.16 군사 정변 발생 이전부터 남한에서 군사 정변이 발생할 것을 예측하고 상황을 예의 주시해 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 주재 중공 대사관이 정변 당일 작성한 남조선 군사 혁명 정황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김일 부수상이 대사관 측과 만나 김일성의 위임에 의해 5월 16일 하오 중공 측에 정변에 관한 정세를 설명하면서 "혁명을 지지하는 성명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보고서는 또 군사정변이 박정희와 진보적인 군인들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미제 국주 의자들에 의해 기도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90%"라고 추정했다. 북한은 특히 정변 발생 직후, 군사정변 주도세력을 남로당계로 보고 당일 지지 성명까지 준비했지만 이틀 뒤인 5월 18일 조선로동당 중앙상임위원회 회의에서는 "극심한 반동에 의한 쿠데타이며, 혁명 세력은 반동적인 친미 군인들"이라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북한은 당초 추진했던 경제개발계획인 인민경제 향상을 위한 1차 7개년 계획의 시작을 미루는 결정을 내린다. 당시 북한 당국이 중공 외교관에게 전한 회의 내용에는 "우리는 경계를 강화하고 국방 강화에 힘을 집중해야 한다. 올해부터 1963년까지 인민경제계획의 발전을 늦추고 국방과 방어요새 강화에 집중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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