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 대한 이야기[역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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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시리즈로 만들어볼까 합니다.

요즘 토트넘의 손흥민 선수 때문이라도 축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엄청납니다. 심지어 우리 아들 역시 직관하는 게 일생일대의 소원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미안하고도 소원을 못 들어줘서 미안함에 눈물이..

먼저 축구의 유래와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축구의 기원

 

축구 장면을 담은 가장 오래된 유물 - BC 400년

 

이 조각은 아테네 남쪽 해안에 위치한 관문 피레우스항에서 출토된 조각이라고 합니다. 아테네의 돌산 펜텔 리쿠스의 대리석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을 보신 적 있나요? 축구팬이시라면, 특히 유럽 축구광이시라면 보셨을 겁니다.

바로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에 새겨져 있는 문양입니다. 역사적 유물로써 가장 오래된 거라고 합니다.

여기에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축구공도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축구공 유물-서한 시대 206년~AD 8년

 

1~2세기경 로마군을 통해 브리타니아에 전파된 뒤, 오랜 시간을 거쳐 19세기경 현대 방식의 축구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BC 7-6세기경 고대 그리스에서 공을 차고 던지는 경기인 에피 스키로스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고, 스파르타의 공 전투, 로마의 파이닌다(Phaininda)와 하르파스톤(Harpaston)이라는 격투 형식의 공놀이에서 유래됐다는 말도 있습니다.

 

 

 

 

※ 에피스키로스 - 한 팀에 12명 ~ 14명으로 편성된 선수들이 중앙에 원이 그려진 경기장에서 서로 자기 진영의 골라인을 지키는 경기. 방식은 공을 차거나 던지면서 전진해 마지막에는 상대가 지키고 있는 골라인을 넘는 것(골을 넣는 것이 아니라 상대 진영의 골라인을 통과하는 것)으로 승부를 결정했다. 두 팀의 선수들이 상대방 골대 방향으로 공을 손으로 던지고, 발로 차거나 드리블을 하면서 앞으로 밀고 나가는 형식을 취하다 보니 양 팀 선수간의 신체접촉은 불가피했으며 그 피해 정도는 심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올림피아 제전에서 즐겨하던 정식종목 가운데 판크라티온이나 권투 등 격투 종목을 제외하면 가장 치열한 경기일 것이다. 이런 경기방식은 로마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특히, ‘세계 대제국 건설’이라는 특명을 부여받은 로마 군단과 군인에 의해 더욱 심화 계승되었다.

 

 

일러스트 출처

 

※ 하르파스툼 - 그리스인들이 즐겼던 에피 스키로스(Episkyros)의 로마 버전 정도로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즐겼던 하르파스툼은 그리스의 에피 스키로스와는 달리 로마 군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경기로 로마군에 의해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경기의 치열도는 마치 전쟁의 수준에 버금가게 되었다. 경기에 사용된 공은 오늘날 축구공에 비해 훨씬 작은 소프트볼 정도 크기의 공을 사용했으며 경기는 양 팀 사이에 던지는 것으로 시작됐는데 양 팀은 공을 상대방의 골라인 너머로 보내기 위해 공격과 수비를 펼쳤다. 그리스의 그것과 유사하였다 볼 수 있으나 로마는 군단의 전투대형을 유지하는 기본 전투대형에 기초해 공격과 수비의 분업이 이루어졌고 다분히 원시적이지만 집단 전투에 필요한 기술(전략·전술)들이 사용되었다. 경기 규칙은 간단했다. 손과 발의 사용은 기 본이고, 별도의 제한사항은 없었다. 그리하여 경기 모습은 아래 사진에 보는 것처럼 전투를 닮아 있었고, 에피 스키로스에 비해 역동적이고 남성미가 넘치는 경기가 되었다. 참가하는 선수들은 엄청난 속도와 민첩성이 필요했고, 과감한 육체적 접촉을 수반했기 때문에 경기 도중 부상은 필수였기 때문에 통상 진흙이나 잔디 위에서 행해졌다. 로마는 당대에 가장 잘 조직된 군대와 고도로 훈련된 전사를 보유한 고대국가였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로마가 그리스의 공놀이를 군대에 보급해 군사훈련으로 채택함으로써 ‘로마제국 건설’이라는 위업의 기틀을 마련하고, 이를 통해 단련된 로마 군단(Roman Legion)을 제국 건설과 운영을 위한 추력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결국 로마의 군대는 유럽에서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각 점령지들을 관장하는 동시에 점령지마다 그들의 전투 공놀이를 소개했고, 전 세계에 전파했음은 틀림없다. 물론 여기에는 ‘브리타니아(Britannia)’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속주가 되었던 축구 종주국, 영국도 포함돼 있었다.

 

신라시대의 축국경기 재연
중국의 츄슈
일본의 게마리

 

그 밖에도 현재의 축구 비슷한 경기가 중국에서 유래됐다고 알려진 경우도 있습니다. 로마, 그리스의 경기가 던지는 방식이 경기 중에 포함돼 있다면 중국에서는 기원전 3-2세기경 츄슈(축국)라는 경기가 발로만 차서 경기하는 형식으로 치러졌다고 알려 있고, 각종 학설들이 나뉘어 있지만 고대 시대에 축구와 유사한 경기가 2-3세기경에 나온 문헌과 고대 작가들에 의해 확인돼 '공놀이'가 예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신라시대 때 '축국'이라고 불리는 동물의 방광에 공기를 불어넣어그 공을 가지고 놀이를 즐겼다고 합니다. 현재 한국의 축구라는 이름의 유래는 신라의 '축국'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츄슈', 일본에서는 '게마리' 등 신라의 '축국'과 비슷한 축구의 유래로 볼 수 있는 게임들이 존재했다고 하네요.

 

 

 

현대적 의미의 축구는 1863년 프리메이슨 테이 번이라는 선술집에서 런던 축구 클럽과 학교 축구부들의 관계자가 모여 회의를 가졌고, 회의 결과 축구 협회(FA)가 탄생되었습니다. 이는 세계 최초의 축구 협회였고, 그 후로 잉글랜드는 잉글랜드 축구 협회가 아닌 그냥 축구 협회라는 명칭을 계속 쓰며 자신이 축구 종주국임을 어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현대의 축구로 자리매김하게까지 축구의 규칙, 체계적인 행정 체제를 발전시켰으며, 세계 각국에 축구를 현대적인 스포츠로 보급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축구협회의 엠블럼은 왕가의 상징인 사자 3마리를 반영하였고, 이후 잉글랜드 대표팀은 삼사 자라 군단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죠.

당시 잉글랜드가 속해있던 ‘대영 제국’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죠. 우리가 ‘제국주의 시기’로 잘 알고 있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전 세계적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많았죠. 대영 제국을 가리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부르기도 하였고, 이러한 영국의 전 세계적인 영향력에 힘입어, <축구의 규칙>에 따른 축구 또한 전 세계적으로 퍼질 수 있었죠. 현재 축구 강국들이 모여 있는 남미 대륙도 이 시절 영국 노동자들과 이주민들을 통해 축구를 전파받게 되었습니다.


 

 

1904년 프랑스에서 FIFA가 설립되면서 축구는 국제적인 조직을 갖추기 시작했고 1930년 제1회 FIFA 월드컵이 개최. 세계 최초 리그가 생긴 잉글랜드에서도 가난한 노동자들 대회로 무시당하고 심지어 FA컵도 초창기에 엄청 무시당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참가팀인 대학팀이 조정 경기를 보러 간다고 기권하는 일도 있었으니... 이러다 보니 초기 축구선수 수입은 엄청 적었는데 1900년대 초반 축구선수 평균 월급은 5파운드 수준이었지 거 합니다. 물론 당시 물가로 치면 헐값은 아니라도 거액은 더더욱 아닌 수준으로 보통 직장인 월급보다 조금 많은 수준이었습니다.
1913년 구디슨 파크에 조지 5세가 축구 경기 관람을 위해 처음으로 영국 왕족이 축구를 공식적으로 보러 방문하면서 시각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1920년대에는 선수 평균 월급이 100파운드 이상으로 확 뛰어오르기 시작했고, 스페인, 이탈리아에서도 차례로 프로 축구리그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축구와 리그 붐은 서서히 더 퍼져갔고 월드컵의 탄생 및 여러 우여곡절로 축구 인기는 세계적으로 더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축구 협회

1860년대 초반, 잉글랜드의 사립학교들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축구 경기를 일치시키고 통합시키려는 시도가 생겨났고. 케임브리지 규칙을 만들고 추진했던 J.C. 트링(John Charles Thring)은 1862년 당시에 어핑엄 스쿨의 교사였는데, 그는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고 "가장 간단한 경기"(어핑엄 규칙)라고 명명했고, 1863년 10월 초에 새로이 수정된 캠브리지 규칙이 해로우, 슈류즈버리, 이튼, 럭비, 말보로, 웨스트민스터의 졸업생 대표로 구성된 7명의 위원회에서 만들었습니다. 

헐의 법무관이었던 에버니저 콥 몰리는 축구를 위한 관리기관 설립을 제안하였습니다. 몰리는 축구 협회의 초대 사무관(1863~1866)을 지냈으며, 2대 회장(1867~1874)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특히 그에 대해 기억되는 것은 최초로 게임의 규칙이라는 저서를 통해 현재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축구 규칙의 밑바탕을 그려놓은 것이었고, 이것으로 인해 그는 축구 협회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축구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프리메이슨 테이번 선술집

 

1863년 10월 26일 저녁, 몇몇 축구팀 대표자들이 런던의 코벤트 가든 구역의 롱 에이커 거리에 위치한 프리메이슨 테이 번에서 모였고, 이는 축구 협회(The FA) 최초의 회의였습니다. 축구 협회는 세계 최초의 축구 관리기관이었으므로, 영국인들은 축구 협회 앞에 '잉글랜드'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았고, 런던의 채터하우스는 초대에 응해 참석한 유일한 학교였습니다. 첫 회의에선 각 사립학교 대표자들에게 협회에 가입하길 요청하자는 결론을 도출하였고, 트링이 재직하던 어핑엄 스쿨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학교가 거절하였습니다. 1863년 10월부터 11월까지 총 6번의 축구 협회 회의가 열려 위원회의 위원이었던 J. F. 앨콕 (J. F. Alcock)은 "케임브리지 규칙은 협회가 채택하고픈 가장 탐나는 것이었다."라고 말했었고,
세 번째 회의가 끝나고 규칙의 초안을 축구 협회가 출간하였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회의가 시작될 때, 세간의 주목을 끈 것은 최근에 발간된 1863년의 케임브리지 규칙이었습니다. 케임브리지 규칙은 축구 협회 규칙의 초안과 중요한 두 가지 차이가 있었는데 즉, 공을 가지고 뛰는 것 과 해클 링 (상대방 선수의 정강이를 차는 것)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논쟁이 발생한 두 가지 규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각 대표단의 회의 모습

 

  • 만약 선수가 정당하게 공을 잡았거나, 첫 번째 바운드에 공을 잡았으면 선수는 상대방의 골문을 향해 공을 가지고 뛸 수 있다. 그러나 정당하게 공을 잡았을 경우에 만약 그 선수에게 수비가 있을 경우에는 달릴 수 없다. 
  • 어느 선수든지 공을 가지고 상대방의 골문으로 있다면, 반대편의 어떤 선수라도 저지하고, 붙잡고, 발을 걸거나 정강이를 차거나 공을 비틀어 빼앗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붙잡고 정강이를 차는 것을 동시에 하면 안 된다.

 

 

 

다섯 번째 회의에서 위의 두 가지 규칙을 축구 협회 규칙에서 제외하자는 제안이 제기되었고, 대부분의 대표들은 이 제안을 지지하였지만, 블랙히스 럭비 클럽의 대표자이자 축구협회의 첫 번째 재무담당이었던 F. W. 캠벨만이 강력하게 거부하였습니다. 그는 "해클 링이 진정한 축구이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제안은 마지막 회의에서 실행되었고, 캠벨은 그의 팀을 FA에서 탈퇴시켰습니다. 12월 8일의 마지막 회의가 끝나고 축구 협회는 "축구의 규칙"을 발간하였고, 이는 최초의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축구 규칙이었습니다. 축구는 또한 "Association football"을 줄인 "soccer"라고 불리기도 하였는데, 그 당시의 공을 들고뛰는 잉글리시 풋볼인 럭비풋볼(Rugby football)과 구별하기 위함이었고, "사커"는 일반적으로 오늘날 여러 국가에서 축구를 부르는 명칭이기도 합니다.
축구협회 회원들에게 승인된 축구의 규칙은 경기장 그라운드의 최대 너비와 폭, 킥오프의 순서, 골, 스로인, 오프사이드와 같은 용어의 정의 등을 명시하였고, 지나가는 공을 잡는 것은 여전히 허용되었으며, "정당하게 또는 첫 번째 바운드 때" 잡는 공만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자세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신발류의 착용, 선수의 수, 벌칙, 파울 행동이나 공의 모양 등에 관한 자세한 규칙이 없었기 때문에, 경기에 참가하는 팀의 주장과 감독은 경기전에 이러한 것에 대한 합의를 먼저 이루어야 했습니다.

 

 

대회의 창설과 FA컵

 

첫번째 FA컵 결승에 오른 로열 엔지니어스 팀

축구 협회가 만든 규칙은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와, 셰필드와 노팅엄이 FA 규칙에 의한 1년 일정의 경기에 참가하기로 하였고, 다음 2년 동안 체스터필드와 스토크가 참가하였습니다. 이는 성문화 된 형태의 스포츠가 더 이상 사립학교들만의 배타적인 스포츠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였는데, 이때까지 한 팀은 각각 11명의 선수가 뛰게 되었고, 경기는 둥근 공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전방으로 공을 패스하는 경우를 없애고, 공 앞에 위치한 모든 선수가 오프사이드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럭비와 유사했으며, 이 규칙은 완화되었다. 1866년에 규칙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관찰하기 위해 축구 협회에서 허용한 셰필드와 런던의 경기가 열렸습니다. 그 결과, 공을 손으로 잡는 규칙은 한 팀에 단 한 명, 골키퍼를 제외하고 폐지되었고, 또 붉은 끈이 양쪽의 골대 사이에 붙여졌는데, 이는 골대의 높이를 알려주는 것이었고, 그리고 전국적인 대회의 개최가 제안되었습니다.

 

찰스 윌리엄 앨콕

 

1871년 7월 20일에 선덜랜드 출신이자 해로우 스쿨의 졸업생이었던 찰스 윌리엄 앨콕(Charles William Alcock)이 "축구 협회와 연관되어 만들어진 챌린지 컵"의 개최를 제안하였는데, 이것이 FA컵의 탄생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1872년에 열린 최초의 FA컵에서 원더러스와 로열 엔지니어스가 결승전을 펼쳤습니다. 로열 엔지니어스는 강력한 우승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선수 한 명이 쇄골이 부러진 상태로 경기를 계속했지만, 그 당시에는 교체 제도가 아직 도입되지 않았을 때였기 때문에, 로열 엔지니어스는 한 명이 적은 상황으로 남은 경기를 치렀고, 결국 1-0으로 패하고 말았습니다.

FA컵은 성공적이었고, 몇 년 만에 잉글랜드에서 참가를 원하는 모든 팀이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참가하기 위해서는 FA 규칙을 준수해야만 했고, 이는 보편적 규칙의 빠른 확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 규칙들이 현재의 축구의 줄기를 이루는 주요한 기본이 되었습니다.

후에 대회는 '신사'이자 남부인이 주를 이룬 올드 이트니언스, 원더러스, 로열 엔지니어스, 옥스퍼드 유니버시티가 주도하였는데, 이들이 가져간 우승컵은 총 19번이었습니다. 퀸즈 파크는 1873년의 FA컵 (이 해의 대회는 지난 대회 우승 팀인 원더러스에 도전하는 방식의 구성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FA 챌린지 컵이라고 불렸다.) 준결승에서 기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잉글랜드로 오는 여행 경비의 지속적인 부담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바로 스코틀랜드 축구 협회의 설립을 가져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퀸즈파크는 스코틀랜드 축구 협회가 스코틀랜드 클럽의 참가를 금지한 1887년까지 결승에 두 번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1872년~1910년까지 사용된 FA컵 우승 트로피

1872년에 앨콕은 20파운드에 FA컵 트로피를 구입하였으며. 그해, 첫 대회에 15개 팀이 대회에 참가하였고, 퀸즈 파크는 상대팀의 기권으로 인해 준결승에 경기 한번 없이 진출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음에 펼쳐진 원더러스와의 경기에서 골없이 비기자, 퀸즈파크는 기권해야만 했는데, 그 당시는 연장전과 승부차기가 등장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퀸즈 파크로서는 런던으로 다시 와 재경기를 할 형편이 안 되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준결승에서 승리한 원더러스는 최초의 FA컵 우승(기권승)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리그

 

잉글랜드 최초의 풋볼 리그

1888년에, 애스턴 빌라의 관리자였던 윌리엄 맥그리거는 런던과 맨체스터에서 열린 12개 축구팀이 관련된 회의에서 힘껏 리그 대회를 계획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12 클럽은 후에 풋볼 리그의 원년 멤버가 되고 회의는 1888년 3월 22일에 런던에서 개최되었으며, 주요 의제는 녹아웃 형태의 FA컵에서 일찍 탈락하는 팀은 거의 1년 동안 아무 경기가 없기 때문에, 재정적인 손실뿐만 아니라, 팬들 역시 경기 없이 오랜 기간 동안 지내기 때문에 다른 팀이 경기할 때,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의제는 4월 17일에 맨체스터에서 결정하기로 하였습니다.

맥그리거는 풋볼 리그의 명칭에 대하여 투표를 붙였지만, 대다수의 찬성으로 풋볼 리그라는 명칭이 선택되었습니다. 대회는 일정에 따라 진행되고, 리그 참가팀 간에 경기가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팀들은 균등하게 북쪽, 미들랜드, 남쪽으로 나뉘었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여전히 아마추어였다는 것입니다.

라이벌 리그였던 풋볼 얼라이언스(Football Alliance)는 1889년부터 1892년까지 진행되었고, 1892년에 두 리그는 공식적으로 통합하기로 결정되었으며, 대부분의 풋볼 얼라이언스 팀을 포함하여 풋볼 리그 2부 디비전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리그 팀들에 얼라이언스 팀 가운데 상위권 세 팀을 합하여 풋볼 리그 1부 디비전을 형성하였습니다.

 

최초의 국제경기

 

최초의 국제경기 잉글랜드VS스코틀랜드

1872년 11월 30일에 펼쳐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첫 번째 국제 축구 경기
28세에 축구 협회의 사무관이 된 찰스 윌리엄 앨콕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에 매년 펼치는 정기적인 국제대회를 개최하는 문제를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글래스고에서 내놓은 지면 광고는 두 국가 간의 국제경기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었고, 광고 이후에 스코틀랜드 선수로 구성된 팀을 구성하고 퀸즈 파크 FC의 설립을 도운 세 형제 중의 하나인 바비 스미스를 주장으로 삼았고, 그의 팀은 전부 잉글랜드에 거주하는 스코틀랜드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872년 11월 30일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서 열렸던 이 최초의 국제경기는 득점 없이 0-0으로 비겼으나, 축구의 역사를 통해 가장 치열하게 진행되는 라이벌전 중 하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두 팀 간의 두 번째 경기는 1983년 3월 8일에 열렸고 잉글랜드의 4-2 승리로 돌아갔고, 다음 경기에서는 스코틀랜드가 2-1로 승리하였고, 네 번째 경기는 2-2로 비겼고, 이후 세 경기 연속으로 스코틀랜드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두 팀 간의 모든 경기 결과는 FIFA 웹사이트에서 찾을 수 있다.)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축구가 1870년대와 1880년대 인기를 얻어갈 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프로페셔널리즘은 금지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1880년대에 잉글랜드 북부에서 원더러스가 해체되자, 각 팀들은 '프로선수'들을 고용하기 시작하였고, 축구에 최초로 프로페셔널리즘이 도입된 시기이기도 합시다. 노동자 계급이 있는 지역의 클럽, 특히 북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지역에서는 노동 외에도 축구를 할 여유가 있는 프로축구를 원했었는데, 몇몇 클럽에서는 프로선수를 고용하는 것을 비난하기도 하였고, 1885년에 축구 협회는 프로축구가 정당하고 인정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임금 제한이 존재했고, 하층 계급을 선수로 고용한 북부 클럽들은 탄력이 붙어 아마추어인 '남부의 신사'들을 넘어서게 됐습니다. 1882년에 FA컵 결승에 오른 북부 클럽 팀인 블랙번 로버스는 올드 이트니언스에게 졌는데, 올드 이트니언스는 FA컵에서 승리한 마지막 아마추어 팀이 되었습니다.

브리티시 레이디 풋볼 클럽 섭립자

프레스턴의 딕 케르스 레이디와 같은 초기의 잉글랜드 여성팀들은 자선 기금을 모으는 경기를 통해 인기를 얻었고, 최초로 기록된 여자 축구 경기는 1895년 3월 23일에 펼쳐졌는데 잉글랜드 북부팀과 남부팀 간의 경기였습니다. 모금을 위한 자선경기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는데 1921년에는 여자들이 FA 리그 경기에서 플레이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축구 협회의 역사에서는 이 금지령이 향후 40년 동안 잉글랜드에서 "사실상의 경기를 망쳤다"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1934년에 스웨덴 클럽인 말뫼는 그 당시 스웨덴에서 허용되지 않았던 규정인 선수들에게 봉급을 지불했다는 것이 밝혀져 스웨덴 1부 리그에서 강등당하였습니다.

전 세계로 퍼지는 축구
유럽 대륙

 

유럽 축구연맹

유럽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클럽팀은 스위스 클럽인 로잔 축구 크리켓 클럽으로 1860년에 창단되었습니다.

축구는 1879년에 잉글랜드 거주자들이 덴마크 클럽인 쾨벤하운 BK (KB)와 스위스 클럽인 FC 장크트갈렌에 도입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KB와 장크트갈렌은 유럽 대륙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축구 클럽이 되었고, 덴마크 축구 협회는 1899년에 설립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축구는 설립되었던 1898년부터, 이탈리아 축구 협회가 세리에 A를 전국적인 리그로 조직하던 1929년까지 지역별 그룹 리그로 진행되었습니다. 스페인의 내셔널리그인 라 리가는 1928년에 첫 시즌을 시작하였는데, 1902년부터 시작된 코파 델 레이 우승 팀도 다음 시즌에 참가하였고, 독일의 축구 리그인 분데스리가는 유럽 국가 가운데 설립이 늦어 1963년에 설립되었습니다. 독일 축구 협회는 1900년에 설립되었는데 1903년에 독일 축구 우승 팀이 최초로 결정되었습니다. 분데스리가가 조직되기 전까지 독일 축구는 많은 수의 지역 리그에서 아마추어 단계의 축구가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남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축구연맹

아르헨티나에서 기록된 첫 번째 축구 경기는 1867년에 잉글랜드 철도 노동자들이 겨룬 경기였습니다. 남아메리카의 첫 번째 클럽팀은 1887년에 창단된 힘나시아 라 플라타이다. 아르헨티나의 프로리그는 1931년에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가 만들었고,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는 1893년에 스코틀랜드 학교 선생님이었던 알렉산더 왓슨 허튼이 설립하였습니다. 아르헨티나 최초의 축구 대회는 1891년에 개최되었고, 영국 이외의 지역에서 열리는 가장 오래된 리그가 되었다고 합니다.

1870년대에 상파울루의 철도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이주민 존 밀러라는 영국인이 1890년대에 영국에서 3000여명의 이주민을 데려왔는데, 존 밀러는 그의 아들 찰스 윌리엄 밀러를 교육을 위해 잉글랜드로 보내기로 하고, 1884년에 찰스가 10살이 되자 사우샘프턴에 있는 배니스터 학교에 보냈습니다. 찰스는 타고난 축구 선수로 두각을 나타으며, 축구 협회는 그 당시 즈음에 설립되었습니다. 잉글랜드의 많은 대학들은 각자의 축구 규칙을 만들었고 찰스는 윙어와 스트라이커로서 학교의 명성을 드높이며, 사우샘프턴 클럽 팀에 들어가게 되었고 햄프셔 주 대표팀에도 선발되었습니다.

찰스는 브라질로 돌아올 때, 축구 장비와 규정집을 가지고 왔고, 그는 상파울루 지역사회에서 통용될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돌아오기 6년 전인 1888년, 첫 번째 스포츠 클럽인 상파울로 AC가 상파울로에서 창단되었고, 밀러의 기술은 그 당시에 이미 동료들과 큰 차이가 있었는데, 그는 뒤꿈치를 이용한 볼트래핑으로 그의 이름을 명예의 전당에 올렸습니다.

찰스 밀러는 그의 삶을 통틀어 잉글랜드 축구와 깊은 유대를 가지고 있었고, 사우샘프턴 클럽과 코린티안스 FC가 브라질로 와서 상파울로 AC와 상파울루의 다른 팀들과 경기를 가졌습니다. 1910년에 코린티안스팀이 브라질로 여행을 다녀간 후에 새로운 지역 팀이 탄생했는데 찰스는 팀의 이름을 코린티안스로 할 것을 제안하여 현재의 코린치안스가 탄생하였며, 브라질 축구 협회는 1914년에 설립되었고 지금의 브라질 세리에 A는 1971년에 시작되었습니다.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축구의 발전

FIFA의 설립

 

국제축구 연맹 FIFA

20세기 초에 국제 경기에 대한 인기가 증가하면서 전 세계의 축구 경기를 감독할 단일 단체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잉글랜드 축구 협회가 주가 되어 국제단체의 설립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오갔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다는 것에 합의하고 유럽의 7개국이 함께 모여 새로운 협회를 만드는 것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FIFA (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는 1904년 5월 21일에 프랑스의 파리 시에서 설립되었습니다. FIFA라는 명칭은 프랑스어로 된 명칭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오늘날까지도 계속 사용되고 있고 비 프랑스어권에서도 이렇게 쓰였는데, 첫 번째 회장은 로베르 게렝이었습니다.

FIFA가 주관하는 첫 번째 국제 대회는 1906년에 있었는데,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이것은 경제적인 요인과 복합적으로 연계되어 있었으며, 이로 인해 회장의 빠른 교체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 회장은 잉글랜드 출신의 대니얼 벌리 울폴. 다음 대회인 1908 런던 올림픽에서의 축구 대회는 FIFA의 축구 원칙과 어긋나는 프로 축구 선수의 출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성공적이었습니다.

FIFA의 가입국은 유럽을 넘어서 1909년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가입하였고, 1912년에는 아르헨티나가, 1913년에는 미국이 가입하면서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FIFA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많은 축구 선수들이 전쟁에 참전하였고, 국제 경기를 하기 위한 여행이 심각하게 제한되면서 허덕이기 시작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회장인 울폴의 사망에 따라 연맹은 알렉산더 바르톨로뮤가 맡게 되었지만, 1919년에 그가 사망하면서 네덜란드 사람인 칼 허치먼이 맡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협회는 존속되었지만, 세계 대전의 적대국과 함께 국제 대회에 참가하는 것을 꺼린 영국 내의 4개국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이 탈퇴하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지요. 

1946년에 영국 내의 4개국이 다시 가입하였고, 1947년 5월 10일, "세기의 경기"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햄던 파크에서 135,000명의 관중이 모인 가운데 영국과 '그 외 유럽 국가와의 경기가 열려 6-1로 영국이 승리하였습니다. 이 경기를 통한 수익은 35,000파운드에 달했는데, 이는 FIFA에게 주어졌고, 이를 가지고 2차 대전 이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전후 첫 번째 월드컵이 1950년에 브라질에서 열리게 되었으며, 그동안 FIFA는 가입국의 확대를 그때까지 계속하여 50주년 기념일에 84개국을 회원으로 맞아들였습니다.

 

FIFA 남자 월드컵

 

2018 러시아월드컵 우승 프랑스 대표팀

첫 번째 축구 월드컵이 1930년에 우루과이에서 열렸습니다. 첫 대회의 결승전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였는데, 양 국 모두 자신의 공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 당시에는 각국의 공의 규격이 통일되지 않았음) 결국 전반전엔 아르헨티나의 공을 사용하고, 후반전에는 우루과이의 공을 사용하였습니다. 첫 월드컵에는 많은 나라가 참가하지 못했고, 주로 아메리카 국가가 많이 참가하였습니다. 그러나 1950년까지 유럽 팀들이 관심을 보이며 대회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축구 대회로 발전하였고, 이로부터 많은 대회들이 등장하였습니다. 유럽축구선수권대회, 남아메리카의 코파 아메리카, 오세아니아의 OFC 네이션스컵, 아시안컵,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북아메리카의 CONCACAF 골드컵이 각 대륙의 주요 대회가 되었으며 브라질은 월드컵 최다 우승국으로 5회 우승을 하였습니다.

 

FIFA 여자 월드컵

 

2019 프랑스월드컵 우승 미국대표팀

FIFA 여자 월드컵의 첫 대회는 1991년 FIFA 여자 월드컵으로 중국에서 12개의 팀이 참가하였고, 1999년 FIFA 여자 월드컵에는 650,000명의 관중이 경기장을 찾았으며 거의 10억에 가까운 시청자가 70개 국가에서 시청하였습니다. 여자 축구의 대륙별 연맹 명칭은 남자 축구의 대륙별 명칭과 동일합니다. FIFA 여자 월드컵의 첫 대회는 1991년 FIFA 여자 월드컵으로 중국에서 12개의 팀이 참가하였고, 1999년 FIFA 여자 월드컵에는 650,000명의 관중이 경기장을 찾았으며 거의 10억에 가까운 시청자가 70개 국가에서 시청하였습니다. 여자 축구의 대륙별 연맹 명칭은 남자 축구의 대륙별 명칭과 동일합니다. 여자축구는 월드컵이 아니면 잘 안 봐지더군요. 남자축구에 익숙해져서인지도 모르겠네요.

 

다음편에는 전 세계의 리그편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긴 내용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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