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강헌 사건 유전무죄 무전유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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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무죄 무전유죄는 돈 있는 사람은 죄가 없고, 돈 없는 사람은 죄가 있다는 말이며, 똑같은 죄를 짓고도 사회적 계급에 따라 다른 처벌을 받는 것이다. 과거 신분제가 당연시되던 시절에는 당연한 것이었으나 헌법이 만인 평등을 보장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임에도 종종 발생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특히 범죄 행위에 대한 처벌은 사회 정의와 관련되어 있는데, 돈이 있는 이에게 처벌을 면해주거나 줄여주는 것은 대놓고 사회적 부조리와 비상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용어는 부패한 사법부와 황금만능주의를 제대로 꼬집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강헌 사건은 이런 부패한 정권과 사법부에서 대한 참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건을 재구성한 영화 홀리데이도 한 번씩 보는 것도 추천드린다. 6월 14일 SBS에서는 그때 사건에서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지강헌 사건의 전개

1988년 10월 8일, 영등포교도소에서 공주교도소로 이송되던 25명 중 12명이 교도관을 흉기로 찌르고 탈주하여 서울 시내로 잠입했다. 지강헌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달리, 이들은 흉악범이 아니라 잡범인데 사회보호법에 의한 보호감호 때문에 징역형을 마치고도 보호감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과, 560만 원 절도를 저지른 자신은 무려 17년을 살아야 하지만 70여 억 원을 횡령한 전두환의 동생인 전경환이 겨우 7년 선고에 그마저도 2년 만에 풀려난 사실에 불만을 가지고 탈출한 것이다.

 

이 중에서 최후까지 잡히지 않던 5명 중 4명은 경찰의 검문을 피해 서울시에서 은신처 여러 군데를 전전하다 10월 15일 밤 9시 40분경 서대문구 북가좌동 고모 씨의 집에 잠입해서 고 씨의 가족을 인질로 잡았다. 이 인질극은 당시 TV로 생중계되었으며, 인질극을 벌인 범인 4명은 다음과 같다.

 

  • 지강헌 (당시 34세, 1954년생) - 과다출혈 사망
  • 안광술 (당시 22세, 1966년생) - 자살
  • 강영일 (당시 21세, 1967년생) - 생존
  • 한의철 (당시 20세, 1968년생) - 자살

 

 

인질로 잡혀있던 집주인 고 씨가 새벽 4시쯤에 탈출하여 인근 파출소에 신고를 했고, 경찰 병력 1천여 명이 집을 포위했으며, 인질범들은 새벽 4시 40분부터 경찰과 대치하여 실랑이를 벌였다. 이 혼란함 속에서 강영일이 협상을 위해 밖으로 나와있을 때 한의철과 안광술이 지강헌이 가지고 있던 총을 빼앗아 자살했고  지강헌은 경찰에게 비지스의 홀리데이 카세트테이프를 요구한 뒤 노래를 들으며 창문을 깨 유리조각으로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했다. 지강헌은 깨진 유리로 자신의 목을 찔렀는데 이를 지켜본 인질이 비명을 지르자 경찰특공대가 인질이 위험한 걸로 판단하여 즉각 진입하여 무방비 상태의 지강헌에게 다리와 옆구리에 총을 발사하였으며 몇 시간 뒤 병원에서 과다출혈로 숨졌다. 당시 검거되지 않았던 5명 중 인질극에 가담하지 않은 마지막 탈주범 김길호가 탈주한 지 1년 9개월 만인 1990년 7월 1일에 체포되면서 탈주극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강헌 일당은 1989년 개정 이전의 사회보호법에서 보호감호 기간을 최대 10년으로 규정한 탓에 이들에겐 10~20년에 이르는 매우 과중한 형량이 내려졌다. 그러나 전두환의 동생인 전경환은 무려 수십억 원대 사기와 횡령으로 1989년 징역 7년을 선고받았으나 실제로는 고작 2년 정도 실형을 살다가 풀려났다. 지강헌 등은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는 특혜를 받고, 돈 없고 권력이 없으면 중형을 받는 대한민국의 불평등한 현실에 분노한 것이라는 게 명분이었다. 지강헌 일당들은 비록 인질극을 벌이기는 했지만 "죄송하다 조금만 참아달라", "금방 끝날 테니 이해해달라." 면서 두려워하는 인질들을 달랬고, 경찰들 앞에서 인질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고성을 지르면서도 인질에게 귓속말로 "절대로 다치지 않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최대한 인질들을 배려하려 했다. 그런데 실제 영상에서 보면 같이 탈주한 동료에게는 과격하게 대했는지 강영일만큼은 권총 한 발을 위협사격하면서까지 자수를 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지강헌 사건의 의미

 

이 사건으로 사회보호법의 단점이 폭로되기 시작했으며, 이후인 1989년에 사회보호법이 개정되며 보호감호 기간이 7년을 넘지 못하게 고정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시민단체와 보호감호 피해자에 의해 '이중처벌'이라는 지적을 받으며 2005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당시에 체포되었던 전경환과 비교되어 대한민국 경찰이 시국치안에는 강하지만 민생치안에는 무능한 경찰이라는 인식이 퍼지게 된 한 계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회에 준 충격은 매우 컸다. 언론은 물론이고 정치권 등 사회 각계는 나라에 큰 변고가 일어난 듯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우여곡절 곡절 끝에 나온 영화가 양윤호 감독의 홀리데이다. 영화 홀리데이는 이제 관객의 뇌리에서 멀어졌지만 이 영화가 주제로 삼은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교훈은 여전히 살아 있다.

 

대기업의 비리가 큰 사회 문제로 부각되면서 지강헌의 명언은 화이트칼라 범죄를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얘기도 있지만, 쉽게 변하지 않는 게 사실이다. 회사 돈 수백억 원을 횡령, 탕진한 한 대기업 총수 일가에 대한 집행유예 판결은 사법부가 서민들에게는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거액의 돈을 횡령하거나 분식회계로 국민 경제에 피해를 준 기업인에겐 대부분 가벼운 처벌을 해 온 것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다. 미국에 110억 달러의 분식회계를 한 월드컵의 CEO에게 25년의 중형을 선고한 미국 법원의 판결을 사례는 우리나라에선 무색하다. 32년 전 지강헌이 비장하게 내뱉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은 결코 한 잡범의 유치한 말장난이라고 볼 것이 아니다. 그는 인질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만 돈이 없어 변호사를 사지 못하는 무전층의 범죄에 가해지는 형벌이 유전층에 비해 너무 가혹하다는 푸념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이런 지강헌이 지하에서 탄식을 할지 모른다. 32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유전무전 무전유죄는 아직 존재한다.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란 무엇일까? 지금도 어디선가 힘없고 돈 없는 자들의 절규가 들리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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